2020-08-26

약산 김원봉 선생 컬러사진 복원 ........




약산 김원봉(1898.09.28~1958.11.??)

약산 김원봉 선생, 당시 현상금 100만원 (현재 가치로 330억원)
일본에 의해서 역대 세계 최고의 현상금이 걸려있던 독립운동가
오사마 빈라덴에게 540억의 현상금이 걸리기 전까지 전세계 역사상 최고액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설하여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의 대상
언제 어디서 나타나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폭탄을 투하할지 몰랐기 때문


의열단원들은 모이면 항상 사진 찍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그들이 일제에 의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


중국과 연이 있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조선의용대를 편성,
의용대장으로 취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 김구 주석에 의해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

해방 후 귀구한 뒤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족주의민족전선에 합류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에서 주도한 총파업에 연루돼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노덕술에게 고문 받아 충격을 받는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일본경찰에게 20년 넘게 잡히지도 않았던 약산 김원봉이 
일본에게 당하지 않은 수모를 해방 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한테 당한 치욕으로 기록됨
의열단 동지의 회고에 따르면 풀려난 뒤 

약산 김원봉은 술을 마시며 사흘을 쉬지않고 호랑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함

이후에도 이승만, 친일파들의 정치 암살 표적이 되어 지속적인 테러를 당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가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됨.
김원봉은 이름높은 독립운동가였으나 명목상 고위직을 맡다가 숙청됨
김일성에 의해 '국민당 장개석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울분을 참지 못해 청산가리를 한움큼 입에 털어넣고 자살했다고 알려진다.


약산 김원봉의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독립운동 독립전쟁의 삶은 그렇게 끝이났다. 
그토록 일본이 두려워했던 김원봉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채 한많던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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