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5

광복 하루 전에 순국한 독립운동가 .......




유상근 선생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통천공립보통학교에 

했으나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만주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중국 연길현 용정으로 이주했을 때 항일투사를 많이 배출한 '동명중학교'에 입학했고 

백평리 갑산촌으로 이사한 뒤에는 역시나 어려운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으나 

야학과소년단을 창설해 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주력했다.

19세가 되던 1927년, 갑산촌에 불시 검문 나온 일본 순경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

났는데 이 사실을 들은 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을 벗어나 이모부가 거주하던 

하얼빈으로 탈출했다.

1930년 그는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만났고 동명중학교와 갑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항일 투사들의 

이야기들을 들었고 일본 순경과 맞선 조선인 청년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유상근을 많이 아꼈다.

김구 선생은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버스회사의 검표원 일자리를 소개해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언어, 관습 등 여러가지 시행착오로 직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홍콩과 광둥 지방을 오가며 인삼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932년, 김구 선생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돌아와 김구 선생이 단장으로 있던

 대한인교민단의 한인사회 치인과 밀정처단의 임무를 가진 의경대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그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중국 대련에 국제 연맹 리튼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김구 선생은 환영식에 참가하는 일본군 고위 관료들을 처단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이 거사를 실행할 요원으로 그가 선발되어 함께 참여하는 한인애국단 

단원들과 사진 한 장을 찍은 후 상해를 떠나 대련으로 이동한다.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 뒤에 있는 유상근 선생



유상근 선생 자필 이력서    


그리고 그에게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수통 폭탄 주어졌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에 이어 다음 의거를 담당하게 된 그 였으나 거사 당일인

5월 26일을 이틀 앞두고 대련에서 상해로 보낸 비밀전문이 발각되어 함께 거사에 

참여하며 김구 선생과의 중간 연락책을 담당했던 최흥식 선생이 체포 되었고 

이후 유상근 선생 또한 체포된다.

관동청재판소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치안유지법과 기타 말도 안되는 죄명이 

붙여져 최흥식 선생은 사형을 받았으며 유상근 선생은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후 뤼순감으로 이감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룬다.

그리고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옥중 고문사로 그는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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