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3

첼로적 인간 노회찬의 위대함에 대하여 .....




고故 노회찬 의원 2주기에 부쳐 ― 
<첼로적 인간 노회찬의 위대함>에 대하여


1.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위대함>이란 "도량이나 능력, 업적 따위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라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매우 다릅니다. 차라리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위대함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경험한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더 높은 자존감을 소유한 인간으로 되기를 실천하는 것. 끊임없는 자기 극복과 변화[변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극한으로까지 몰아가고자 하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잘' 실패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서 다음의 단계로 도약하는 것. "

위대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은 신神이나 슈퍼맨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변이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 극복과 자기 변이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어떠한 목적도 종착역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끊임없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인간―생물학적 인간, 사회학적 인간 노회찬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인간 노회찬―의 전형을 노회찬이라는 고유명에서 발견합니다.

2.
첼로적 인간 노회찬 의원께서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난지 어느덧 2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문제이자 사건으로서 우리 앞에 던져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기!
그것은 상처입니다. 그러나 그 수수께기가 잘 풀린다면, 우리는 그만큼 그를 더 '잘' 애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럴수록 고故 노회찬의 의원의 위대한 유산을 더 잘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유산의 계승 과정은 위대한 애도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노회찬 의원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모두에, 아니 오히려 둘 사이에, 그 경계에, 흔적들과 흔적들의 흔적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징표이자 사물로서의 첼로. 김어준 총수는 2007년 대선에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 의원께 "대선후보로서 어떤 세상을 제시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고故 노회찬 위원께서는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여유롭게 다룰 수 있는 세상"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고故 노회찬 위원에게 첼로는 단 하나의 사물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부모님 덕분에 고故 노회찬 위원은 첼로를 평생 곁에 둘 수 있었습니다. 경계 위에선 사물로서의 첼로와 노회찬.
클래식 악기들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들 중에서도 첼로는 가장 매력적이고 섹시합니다. 두 발을 벌린 채 그곳에 악기를 세워놓고 앉아서 연주를 하는 첼로는 인간과 사물이 어떻게 하나의 경계 위에 함께 설 수 있는지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악기입니다. 침착하고, 묵직하며, 깊이 있는 음색을 지닌 첼로는 클래식 악기 중 인간의 기氣의 흐름과 가장 가깝게 잇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한/아무개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이자, 그 자신도 그 모든 사람들중 '하나'였던 노회찬, 그리고 그의 곁의 첼로.
첼로적 인간, 노회찬!

3.
한편, 그의 유머는 첼로와 더불어 정치인 노회찬으로 하여금 진보 정치의 낡은 한계로부터 벗어나게끔하는 통로였습니다.
"부르주아적 사물을 소유해서는 안 돼.", "운동권, 정치가라면 진중해야지, 가벼워서는 안 돼."
그 주위의 자/타칭 진보주의자들이라는 자들은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도덕적 명령과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일매우 금욕주의적이고, 도덕적이고, 고리타분한 억압과 금지의 법을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노회찬 의원은 다르면서도 같은 이 두 세계의 도덕과 금지의 법/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진보와 좌파는 클래식을 들으면 안 되는가?"
"왜 진보와 좌파는 음울하고, 금욕주의적이고, 고리타분해야만 하는가?",
"왜 진보와 좌파는 항상 부채의식, 양심의 가책, 죄의식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왜 진보와 좌파는 보다 경쾌하고 유머러스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노회찬이라는 고유명이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가 유머(의 힘)를 아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위 운동권 출신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유머의 힘을 알았습니다. 정치에 있어서의 유머의 힘을 알았다는 것은 그가 지배자들이 던진 도덕과 금욕이라는 올무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른 정치가들(고故 김대중 대통령,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더불어 척박한 한국정치에 그가 남긴 유산이었습니다. 이제 그 누가 한국정치에서 모든 부정의 힘을 돌파하는 단독적인 유머의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4.
노회찬 의원에게 있어 이땅의 모든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받고, 얽눌린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는 그의 '정치적 이상'이자, '이상적 정치'였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열정>을 가진 정치가였고, 그 열정은 대의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사물과 사람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 즉 <균형감각>을 소유한 정치가였습니다[이 세 가지는 막스 베버가 지적한 정치가가 지녀야 할 자질들입니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106~7쪽].  
노회찬 의원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 존재가 규정되어버린 <이름없는 '자'들>, <존재하되 존재를 인지할 수 없는 '자'들>, <자기 몫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
고故 노회찬 의원의 6411번 버스는 그런 자들에게 자본과 권력에게 빼앗겼던 자신들의 삶, 자신들의 정치를 되돌려주는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대의하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삶과 정치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자신에게는 너무나 엄격한 잣대들을 들이댄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직업으로서의 정치가였던 자신의 소명Beruf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았던 그였기에 더 욱더 그렇습니다.
"좀더 멋 좀 부리고 인생 살아도 되었을 텐데", "선글라스 몇 개 쯤은 더 가져도 됐을 텐데", "내면의 진정성에 부드러운 기름칠 정도 해주는 겉멋이 조금만 더 들어도 됐을 텐데..."

5.
<첼로적인 인간 노회찬>!   
그는 첼로를 사랑하며 유머의 힘을 알았던 최초이자 최후의 정치가 였습니다. 정치에 있어서의 유머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모든 감각을 분쇄하는 고도로 정제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감각적 힘이자 폭력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진정성 있는 언어와 몸짓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라는 이름에 걸맞는 그 무엇이 생성됩니다. 고故 노회찬 의원은 그의 삶과 정치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런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노회찬이 <정치적 회색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회색분자>는 정치의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거나 또는 지워버리는 자입니다. 그들은 적과 친구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고, 싸움이 어디에서 왜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호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공동체의 언어, 공동체의 삶, 그리고 공동체의 정치를 좀먹고 오염시키는 자들. 그들의 권모술수, 사기, 모략, 음모, 분탕칠에 의해 우리는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노회찬을, 그리고 박원순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 <정치적 비참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
끝으로 고故 노회찬 의원의 바람대로 한국사회가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여유롭게 다룰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그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평등한 세상일 것이라는 것을 꿈꿔봅니다.
<공생하는 삶>과 <공생하는 사회>!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첼로적 인간, 그리고 유머의 힘을 알았던 최초이자 최후의 정치가 고故 노회찬 의원을 애도하며...


'Ritournelle' 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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