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5

'서태지 前 부인' 이지아 미스터리 풀렸다 .....





탤런트 겸 영화배우 이지아(본명은 김상은이고, 후에 김지아로 법적 개명을 함)는 

1978년 2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이지아 고향). 올해 37살이죠(이지아 나이).

(이지아 학력 학벌) 패서디나 아트센터 대학 그래픽디자인(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이지아 프로필 및 경력) 2004년 12월 방송된 LG텔레콤 (현 LG유플러스) 《랄랄라》편 

광고에 첫 출연함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수지니 역으로 공식 데뷔함

(이때 이지아 배용준 열애설이 루머처럼 퍼지기도 함)

이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스타일, 아테나 전쟁의 여신, 나도 꽃!, 세번 결혼하는 

여자(세결여) 등과 영화 내 눈에 콩깍지 등에 출연합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지아의 전남편은 가수 서태지였습니다.

이지아 소속사 키이스트: "이지아씨는 지난 199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같은 해 미국 현지에서 열린 LA 한인 공연에서 지인(이지아 친언니 김은아)을 통해 상대방(가수 서태지)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이지아씨는 미국에 머무르고 상대방은 연예 활동 등으로 한국에 머무르며 서로 편지와 전화로 계속적인 연락을 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지아 소속사 키이스트: "상대방(서태지)은 1996년 초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 왔으며, 상대방이 미국 생활을 시작하며 이지아씨가 언어 및 기타의 현지 적응을 위한 도움을 주며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계속적인 연인 관계로 진심으로 사랑했고, 이어 1997년 미국에서 단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후 애틀란타와 애리조나를 이주하며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이지아 소속사 키이스트: "2000년 6월 상대방(서태지)이 한국으로 활동을 위한 컴백을 했고 이지아씨는 혼자 지내다가 2006년 단독으로 이혼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2009년 이혼의 효력이 발효됐습니다. 이혼의 사유는 일반인에 비해 평범하지 않은 상대방의 직업과 생활 방식, 성격 차이 때문이었습니다."(이지아 서태지 이혼사유, 이혼이유)


이렇게 이지아 측은 이혼사유를 서태지측의 특이한 가정 생활로 꼽습니다.

이에 대한 서태지측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서태지: "은퇴 이후 힘겹게 얻은 최소한의 보금자리와 처음으로 누려보는 평범한 일상을 보호받고 싶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안정을 찾고 내 인생에도 확신이 생길 때 가장 먼저 나의 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축복도 받고 싶었다."

서태지: "불행히도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가수 서태지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심정을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즉 서태지는 이지아와의 비밀 결혼에 대해서 팬과 대중에게 곧 발표를 하려고 했지만, 곧 이지아와 결별을 했고, 그 이후 이혼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해명합니다.

사실 이지아 서태지는 1997년 결혼했고, 실질적인 결별 시기는 2000년 6월 이전으로 보입니다. 약 2년 6개월간의 짧은 결혼 생활이었죠(이지아 배우자 서태지).

두 사람의 공통된 증언, 그리고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을 비교해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짧았고, 또 이후 서태지의 6집(2000년 9월 9일 발매) 발표 이후에는 완전히 끝장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1997년 서태지는 26살이었고, 이지아는 20살이었습니다.

이지아가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채 결혼식을 올린 것이죠.

또한 서태지는 자신의 결혼식을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이지아는 완전히 숨겨진 존재가 되어야 했다는 점 등은 갓 스무살이 되었던 여자의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서태지가 국내로 컴백하면서 이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고, 이지아 혼자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는 점 등은 서태지의 책임감 부족으로밖에 볼 수가 없네요.

결혼을 같이 했으면 이혼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서태지는 혼자 빠져 버렸죠. 아무리 문화대통령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행동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두 사람 사이에 자녀(자식)은 없다고 공식 발표가 납니다.

미국 교포들이 그들의 자녀를 봤다는 증언이 트위터 등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밑에 서술된 이혼 소송에서도 양육권 등에 대한 사항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네요.(한때 여배우 심은경이 서태지 이지아 딸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사실무근이었죠)

(이후 서태지는 이은성과 재혼함)

그리고 이지아는 본명을 숨기고 예명으로 한국 연예계에서 활동합니다.

남자친구 정우성과의 공식 연애를 하고, 후에 결별하기도 하죠(이지아 남친)(이지아 정우성 결별).

그러다가 2011년 전남편 서태지에 대한 위자료 청구 및 재산 분할 소송을 겁니다(혹은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됩니다).

이지아 측: "2009년 서태지와 이혼한 뒤 아직 위자료와 재산 분할을 받지 못했다. 위자료 5억원에 재산분할 50억원을 요구한다."

이에 대해 서태지 측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서태지 측: "2009년이 아니라 2006년 이미 이혼했다. 2006년 이혼하면서 이지아가 요구하는 대로 위자료도 주고 재산 분할도 해줬다. 그런데 이지아가 2009년에 이혼한 것처럼 속여서 재산 분할과 위자료를 다시 청구한 것이다."

(참고로 양측의 이혼시기아 엇갈리는 것은 이혼시기에 따라서 청구권 소멸시효가 다르기 때문. 위자료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3년, 재산분할의 경우는 2년으로 언제 이혼을 했는지가 중요함. 따라서 이지아는 한국 국내법에 따라 2009년 이혼을 주장하고, 서태지는 미국법을 따라 2006년 이혼을 주장함)

사실 서태지의 말처럼 2006년 이혼할 때 이지아가 서태지로부터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제대로 받았다면, 2011년 위자료 청구소송은 뜬금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지아 서태지 과거 비밀 결혼과 이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지아는 돌연 이혼 소송을 취하합니다.

이지아: "이혼과 소송 사실이 알려진 후 세간의 지나친 관심으로 본인과 가족, 주변 사람들이 사생활 침해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이혼 소송을 취하한다."

하지만 서태지가 열을 받았는지, 소 취하를 거부하는 부동의서를 법원에 제출합니다.

서태지: "상대측이 소송을 제기했고 예고 없이 단독으로 취하를 한 사실이 있다. 따라서 본 사건은 향후 재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고, 본 사건의 사실 확인 또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법원의 판결에 맡기려 부동의서를 제출한다."

즉, 서태지는 소송 취하로 자동 종결된 재산분할 청구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기를 원한 것이죠.

사실 서태지 이지아는 미국에서 결혼생활을 했고, 또 당시 이혼 판결을 받은 미국 LA법원은 2006년 8월9일로부터 이혼 효력이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지아의 갑작스러운 이혼 소송에 서태지 측은 뒷통수를 맞은 것으로 볼 수 있죠.

(원래 미국 법원에서의 이혼 확정 판결은 한국에서도 유효함. 따라서 이지아의 의도는 초기부터 말이 되지 않음. 또한 이지아는 2006년 미국 재판 당시 이미 서태지로부터의 위자료 등 금전적 지원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밝혔음)

결국 재판은 서태지와 이지아가 7월 법원의 조정조서에 합의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서태지 이지아 재판 결과).

이지아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과 서태지의 이미지 추락만 일으킨 재판이 되고 말았네요.

사실 이런 뜬금없는 이혼 소송 제기외에는 이지아가 상당히 불쌍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1997년은 이지아가 갓 미성년자의 나이에서 벗어난 상태였기에, 아무래도 혼인 및 이혼의 책임이 서태지에게 더 기울어야 하죠.

그리고 짧은 결혼 생활과 그 이후의 이혼 과정을 보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서태지가 상당히 무책임한 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이지아 역시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지아는 연예계 데뷔이후에 자신을 홍보할 때 자신의 할아버지 김순흥을 덕망높은 재력가로 포장을 합니다.

모 신문매체: "이지아의 조부모가 생전 육영사업에 기여한 거대 자산가이다. 조부모가 1976년 이전한 서울예술고등학교의 평창동 부지를 기부하는 등 육영사업에 기여했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이지아 집안과 40여 년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해방기 이전부터 대단한 갑부였다. 단순한 부자를 넘어 덕망까지 갖춘 분들이었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이지아 아버지는 오랜 세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개인 사업을 했다. 현재도 미국과 이곳을 오가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때문에 이지아는 물론 가족들 전부 미국 생활을 오래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낸다."

그런데 사실 이지아 조부 김순흥의 정체는 친일파였습니다(이지아 집안).

1910년 서울 출생으로, 일본 제국을 위하여 국방헌금 1만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하고, 조선군사후원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비행기 대금으로 500원,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국방헌금 3000원을 내기도 합니다.

또한 1944년 4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감수포장은 일본 제국의 영전제도로서 일본 제국을 위해 사재를 기부한 사람에게 일본왕이 주는 감색 리본 기장임)(이지아 할아버지 직업 사업가)

김순흥: "나라(일본 제국)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

이런 김순흥의 매국노 활동으로 그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인사 명단 제 1위에 기록되기도 하는 등, 그는 거물급 친일파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덕망높은 재력가'로 포장이 되네요.

유유상종이라고, 민주당 정대철 역시 그렇고 그런 집안이 아닌가 합니다.

이지아는 어린 시절에 굉장히 유복한 생활을 보냅니다.

미국 등에 일찌감치 유학 및 이민을 가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평상시에도 부족함없이 돈을 썼죠.

그런데 그 돈이 친일파였던 김순흥이 벌었던 재산으로부터 나왔던 것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 후손들은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당 이회영 선생과 6형제들은 대단한 재산가였지만, 그 돈을 모두 독립운동에 다쓰고 본인들은 가난속에서 생활합니다. 형제와 가족들 대부분이 일제의 잔혹한 고문속에서 생명을 잃었고요...

하지만 김순흥 같은 친일파들은 일제의 비호 아래에서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또 위에서 언급한대로 일제를 위하여 재산을 내놓은 행동까지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연좌제가 없습니다.

친할아버지 김순흥의 죄를 가지고 친손녀인 이지아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죠.

다만 이지아가 자신의 친일파 할아버지를 '덕망 높은 재산가'로 포장하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죠(실질적으로 이지아 소속사가 언플을 했는데, 이지아 역시 이를 동조 혹은 묵인함).

이지아 사촌: "이지아 할아버지(내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친일파로 몰리게 됐다. 돈은 원래 일제시대 전부터 많이 있었고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 정부에 정치자금 강제로 추징당한 것 뿐이다. 일제시대 때 세금 많이 내면 다 친일파가 되나보다. 에고."

이지아측이 할아버지를 '덕망 높은 재산가'로 변모를 시킨 것도 모자라, 또 다른 후손은 친일파 할아버지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김순흥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구 선생과 임시 정부 인사들의 친일파 리스트 기록이 잘못이고, 또 후세에서 평가한 친일인명사전이 잘못된 것일까요?


출처: http://yurajun.tistory.com/1550 [유라준]


#서태지 #이지아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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