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부부는 가방끈이 짧습니다.
집사람은 저보다도짧습니다.
저는 60이고 집사람은 50초반입니다.
집사람은 식당에서 일을 합니다.
항상 큰 가방을 매고 다닙니다.
출근시에는 빈가방이지만 퇴근시 가방은 항상 가득찹니다.
내용물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지만 주로 먹거리를 한가득 짊어지고
작고 여린 어께에 매고 퇴근을 합니다.
퇴근시간이 인근 고등학교의 하교 시간과 겹처서 무거운 가방을 매고 어린학생들과
자리다툼을 합니다.
솔찍히 또래들이 가방을 매고 학교가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 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들보다 일찍 지하 공장에 출근하면 저녘 늣게나 숙소로 올수 있었으니까요.
어릴적 매어보지 못한 가방을 소원풀이라도 하듯 열심히 매고 다님니다.
식 자재며 과일 푸성귀는 일하는 식당 납품업자에게 사면 많이 싸다고 하네요.
수박이라도 지고오면 날이면 본인의 어께보다.
보는이의 가슴이 더 무겁습니다.
우린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런거 몰랐습니다.
그냥 공장에서 객지생활과, 숙소생활에 지처 갈때쯤 그냥 합쳤습니다.
특별히 바쁘지도 않았고,
잘 살수 있을겄같아서 또다른 지하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좋았으요,
서로의 하는일을 잘알기에 위해줄수 있으서 좋았고,
비록 습하고 어두운 지하방이였지만 둘만의 공간이 너무 좋았으요.
아이가 태어나고 집사람이 아기를 보살피면서 외주를 시작했습니다.
우린둘다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일잘하는 기술자 였고
둘다 부지런 하기까지 합니다.
둘째가 퇴어날때쯤 집사람이 하던 외주를 저와같이 하게됩니다.
잘 되었습니다.
밤 낮 없이 했으요.
1년 정도 하니 20명 정도의 작은 공장이 되더군요.
원청에서도 인정받아 일감도 넘처나고, 공장도 옮기고 몇 년후엔 작은아파트도
생기고 조금의 여유도 있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더군요.
행복은 순간이고 불행은 길었습니다.
I M F.
지금도 무슨 뜻인지 왜 왔는지 모럽니다.
왜 하루아침에 집을 내어주어야 했고.
신용불양자가 되어야했는지 이해가 안되내요.
무었보다 당황스러운겄은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겄입니다.
공장들은 중국으로, 베트남 으로, 다른 나라로 옮겨가고
국내공장들은 거의가 문을 닫습니다.
외국가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신불자는 그겄또한 용의치 않더군요.
서울근교 소 도시로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집사람은 식당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시작한 노가다는 어너순간 목수가 되어 있었고 오야지 였지만
아이들은 커가고 형편은 좀처름 펴지질 않더군요.
하지만 아이들 커는 모습보면서 그리 나쁘진 않았으요.
그겄도 잠시 5년 전 큰일이 일어나네요,
지방공사를 앞두고 가방챙기던중 쓰러집니다.
간암으로 인한 식도출혈로 생사의 기로에 서게됩니다.
소도시에서 응급처치후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옮기게 되고
첫째 병원 대답은 수술불가 3개월 시한부
둘째 병원 에서도 비슷한 답을 듯게되고
세 번째 병원에서 이식을 하게 됩니다.
이식을 망설일 때 아들놈이 하는말이
“ 원래 아빠꺼잖아 부담같지말고, 이식해 ! ”
웃음도 나고 어찌 형언할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이식을 했고. 너무도 생소한
간이식, 부작용, 담관시술, 고열, 설사, 심부전, 투석, 등의 단어들이
짧은 시간에 우리가족에게 순서대로 옵니다.
수술과정에서 담관폐쇄가 진행되어 수술을 25시간이나 했다고 하네요.
보험도 없이 엄청난 수술비 감당과 생활을 위해 둘다 휴학을 했고
몇 년을 항상 교대로 아빠곁을 지키더군요.
예고 없이 올라가는 고열과 설사. 119 단골. 참 힘들었습니다.
4년차 부터 안정이 돼데요. 열도없고. 설사도 없고. 평온합니다.
아이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 가고.
딸아인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중이고.
아들놈은 몸도 좋아지고 여학생도 쫏아다니고.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아빠 감시도 하고 여전히 바쁘네요.
몇일전 절을 다녀왔습니다.
집사람이 묻더군요, 뭘 빌었냐고요
재차 묻길레 당신이 행복해 지길 빌었다고했더니
역정을 내더군요,
자긴 충분히 행복한데 귀한기회에 엉뚱한걸 빌었다고 하더군요.
사람은 참 몰라요. 참 많이 변하기도 하고요.
어릴적은 아내가 잘웃는 사람인줄몰랐으요.
못 배웟기에 항상 주눅이 늘어 생활했어요.
살다보니 웃음이 참 많고 정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네요.
또 내자신도 이렇게 살림 잘할줄은 몰랐으요,
아내가 가저온 식재료는 내손으로 요리를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빠요리에 넘무 격한반응을 보인다고 하지만 저들도 맛있게 먹어요.
진작 알았으면 봉재공장이 아닌 중국집 주방에서 일해볼걸 생각돼요.
우린 조금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크고작은 어려움을 잘견넸네요.
별로 이룬겄도 내세울겄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이 뭔지 어렵풋이 알겄같네요.
이제와서 집사람의 가방끈을 늘릴순 없지만
가방의 무게는 덜어주고 싶네요.
언젠가는 그녀의 가방의 무게 만큼 삶의 무게도 덜어지기를 바레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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